신의

<서병기 선임기자의 대중문화비평> 사랑을 알고 부끄러움도 아는…정치에 ‘섬뜩한 상식’을 묻다

룡2 2012. 10. 23. 10:41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21023000372&md=20121023100412_AI

공민왕 받드는 우달치 대장 최영
물욕 없는 자유인의 삶 꿈꾸나
무거운 책임감으로 임무 수행

물러날 시간 아는 진정한 충신
대선정국 대한민국에 메시지


대선을 앞둔 요즘 대중문화는 정치를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늘고 있다. 

광대 하선(이병헌)을 내세워 광해 임금을 연기하게 하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1000만명 관객을 돌파했다. 왕이 된 그는 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빼내 명나라에 파병하려는 신하들의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공납을 현물 대신 쌀로 납부하게 하는 대동법을 반대하는 신하들에게는 땅을 더 많이 가진 자가 세금을 더 내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왕을 보면서 관객은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특히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事大)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라고 말하는 이병헌의 대사에서는 통쾌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광해’를 통해 국민이 진짜 바라는 지도자상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다고 할 수 있다.

SBS 월화드라마 ‘신의’도 판타지 사극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정치사극이다. 공민왕(류덕환) 시절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되느냐, 마느냐 하는 시점에서 상상력을 가미해 풀어내고 있다. 상상력을 가능하게 하는 변수는 고려시대로 시간여행온 현대의 성형외과의사 은수(김희선)라는 존재다. 은수가 시공간을 이동하면서 고려 말의 문제점들이 관찰자의 시점으로 드러난다. 




                   신의’는 킹메이커인 최영의 입을 빌려 우리가 지도자에게 바라는 바를 이야기한다. 왼쪽부터 최영 역을 맡은 이민호, 공민왕 역의 류덕환, 은수역의 김희선.


‘신의’는 코믹인지, 멜로인지, 액션인지 알기 어려운 애매한 장르 규정이 시청 재미를 반감시키고는 있지만 공민왕을 받드는 우달치 대장이면서 백성의 뜻(민심)도 읽고 있는 최영(이민호)에게는 감정이입되고 있다. 

공민왕을 모시면서 지도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뇌하는 무사, 그리고 사랑을 아는 외로운 눈빛을 지닌 무사 최영에게 시청자들이 빠져들고 있다. 

주로 정치사극이 왕을 통해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상을 보여주는 방식이라면 ‘신의’는 킹메이커인 최영의 입을 빌려 우리가 왕(지도자)에게 바라는 바를 이야기한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했다’는 최영은 욕심이 없는 인물이다. 그의 바람은 지긋지긋한 궁을 떠나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려 하지만 힘이 없는 공민왕을 지키면서 그의 바람은 꼬이기 시작한다. 공민왕의 아내인 노국공주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납치해온 의사 은수에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한 번도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하지 않았다.

최영은 순수했던 첫사랑 매희(김효선)와 아비만큼 따랐던 대장 문치후(최민수)의 비극적인 죽음을 지켜본 후로 그저 죽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삶을 영위해왔다. 하지만 우달치 부대를 이끌고 있는 최영은 부하들에게 자율적인 분위기를 제공하면서도 강한 책임감을 보여 신망을 획득한다. 

최영은 “고려에 대한 충절 같은 건 잘 모르겠다”고 왕에게 고백하는 솔직함을 갖춘 캐릭터로 신선함을 선사했다. 그동안 역사극에서 일반적으로 그려졌던 근원을 알 수 없는 무조건적인 충심으로 가득 찬 무사의 활약이 시청자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했다면, 최영은 무거운 책임감과 타의적인 주종관계에 얽매인 무사로서의 쓸쓸한 애환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세상에 미련이 없던 고려 무사 최영이 ‘부끄러움을 아는’ 왕인 공민왕에게서 인간애를 느끼고 자신의 삶의 활기를 불어넣어준 은수라는 여인에게 사랑을 시작하면서 그의 마음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충심과 신의, 그리고 연정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각성하고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돋보이게 한다. 

왕에게 “언제나 그분(은수)이 먼저였다. 이제 우달치 대장을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모습은 너무나 멋있었다. 물러남과 들어옴의 시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최영에게 우리 정치인들이 배워야 할 것이 적지 않다.

‘신의’ 속 최영은 공민왕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아껴주고 지켜주고 싶은 정인 은수를 위한 한 남자로서 활기를 띤 생을 이어가며 주체적인 무사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 나갈지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