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취향
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이라는 얘기가 있어.
인간의 취향은 때로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주곤 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 왜 ‘나’는 특정한 ‘한 사람’에게 끌리게 되는 걸까.
수많은 만남 속에 어떤 사람은 아무 의미없이 스쳐가는데
왜 어떤 사람은 내게 특별한 의미로 남는 걸까.
8회까지 본 사람들은 누구나 알 수 있듯
지금의 전진호에게 박개인은 예외적이고 또 특별한 존재야.
자신의 포커페이스를 벗겨서 본래의 표정을 드러나게 하고
때로는 웃게 때로는 화나게 어떤 때는 냉정을 잃게도 하는 사람이지.
박개인은 그가 타인을 향해 견고하게 유지해온 거리를 점점 좁혀 들어왔고
어느 순간부터 전진호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기 시작했어.
어째서 그게 장미 씨도 상준 선배도 혜미도 은수도 아닌 박개인이어야 했을까.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무심하다
내가 보기에 전진호라는 캐릭터는 말야.
자기 엄마 앞에서도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고 할까.
그의 마음 속에도 분명 약하고 어두운 부분이 있고
지금 사업 상으로도 골치아픈 문제가 산더미인데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에게까지 하나도 말하지 않아.
어머니는 인간을 믿지 않는 그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너무 여리고 약해서 자기가 보호해야 할 존재이지
기대어 쉴 수 있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야.
아마 어린 시절부터 진호는 가장 노릇을 하면서
엄마 앞에서 든든하고 강한 아들의 모습만 보여왔을 거야.
(‘장미 씨’란 호칭이 이 모자관계를 보여주지 않나 생각해)
그는 자존심 강하고 정직하고 곧은 내면을 가지고 있으며
목표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욕구를 억제하고
흔들림 없이 정진할 만큼 의지도 강한 사람이야.
하지만 그에게는 아버지의 일로 강한 트라우마가 있어.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해서 모든 걸 잃고 죽음에 이른 아버지는
세상은 믿을 수 없고 인간은 더더욱 믿지 못할 존재라는 트라우마를 심었지.
당연한 결과로 진호는 여간해서는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안 열어.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지만 일정 선 안으로는 절대 들여놓지 않아.
늘 한 걸음 물러서 있는 그의 친절은 ‘배려’라는 이름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관계하고 싶지 않음’을 에둘러 얘기하고 있지.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않는 그에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고 기대어 쉴 수 있는 곳 하나 없는 셈이지.
이게 바로 전진호라는 사람의 외롭고 단절된 세계야.
그녀의 약함
근데 그 앞에 박개인이라는 사람이 나타났어.
보면 볼수록 이 여자 진짜 한심한 거다.
자기 엄마랑 너무 닮은 여리디 여린 성격에
바보 같을 정도로 사람을 쉽게 믿고 그러다 뒤통수 맞고 심지어는 또 속아버려.
전진호가 알고 있는 믿지 못할 세상과 못 믿을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보호할 방법조차 모르는 그녀의 ‘약함’은
타인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자신이 애가 타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지.
그래서 친구가 되어주고 얘기를 듣고 충고를 해주고…
그녀가 혼자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해.
하지만 진호는 알고 있어. 아무리 강해지라고 말해도 개인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당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야'라고 독백한 것처럼
개인은 여전히 남을 쉽게 믿을 거고 또 배신당하고 다시 또 용서하겠지.
그는 한 걸음 물러선 상태에서 안타까워하며 지켜보고 있었지.
이 상태에서 그들의 관계는 상당히 일방적인 거였어.
개인이 전적으로 진호에게 도움을 받는 관계. 마치 진호와 어머니의 관계처럼 말야.
그런데 8회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진호가 마음의 문을 열고 개인에게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지.
개인을 향해 마음 속의 혼란과 약함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드디어 양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어.
진호의 마음을 연 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개인의 ‘강함’이라고 생각해.
그녀의 강함
4자대면 커밍아웃 후에 개인은 창렬도 영선도 자기 자신도 놀랄만큼
평소의 그녀라면 믿을 수 없는 행동들을 했어.
창렬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는 원망의 말도 제대로 못했으면서
그가 진호를 향해 모욕을 주자 뺨까지 때리면서 맞섰지.
자기 자신도 보호할 줄 모르는 주제에
타인 앞에서 소수자이며 약자인 ‘게이 전진호’를 보호하려고 했어.
박개인의 약해빠진 맘 속에는 뜻밖에
절대 깨지지 않을 다이아몬드 같은 게 있어.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리 배반당해도 또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강함.
다시 받을지 모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는 무모하고 순수한 믿음.
그게 있기에 개인은 진호를 향해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내면서
그를 위해서 타인과 맞서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않아.
박개인은 참 이상한 여자야.
타인이 주는 상처에 면역도 최소한의 방어막도 칠줄 모를만큼 약하면서
자기가 믿는 사람을 위해서는 서슴없이 세상에 맞설 수 있을만큼 강하거든.
세상이 나를 비난하고 나도 흔들릴 때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굳은 믿음은
내가 기꺼이 위로받고 기댈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이지.
그렇기에 진호는 개인에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 속 약함과 혼란을 얘기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전진호의 29년 인생에서 유일하고도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었을까 한다.
왜 박개인이어야 했는가
생각해 보면 말야.
이 ‘유일함’과 ‘예외적임’이란 누군가와 나눌 수 없는 거야.
놓친다면 다시는 같은 것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절박함을 느끼게 하는 거지.
따라서 전진호가 박개인에게 느낀 이 ‘유일함’은
결과적으로 ‘연애감정’에 귀결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또 앞으로 그를 움직이게 하는 건 그 감정에서 기인한 ‘소유욕’이 아닐까.
진호가 창렬에게서 개인을 떼어놓는다면 그건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과 나누지 않으려는 독점욕이겠지.
자신이 마음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뺏기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해.
결국 전진호의 취향은 박개인인 셈이야.
결론은 이런 게 아닐까.
인간은 스스로 채울 수 없는 내면의 결핍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채우려고 한다.
그래서 때로 당신의 취향은 당신의 결핍을 말해준다.
박개인은 전진호의 마음 속 결핍, ‘믿음’에 대한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전진호의 취향은 박개인일 수밖에 없었다.